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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 내는 것조차 은혜였다" -고난주간 묵상

당신의친구 2025.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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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 내는 것조차 은혜였다" -고난주간 묵상

“누가복음 23:34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의 말씀은 단순한 용서를 넘어,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어디까지 따를 수 있을까요?”

고난주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고난주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다.

십자가는 죄인의 자리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고 조롱하던 로마 군인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나님 아버지, 저 사람들의 죄를 없던 것으로 해주세요. 저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멈칫한다.

 

과연 이 태도를 나는 본받을 수 있을까?

 

요즘 세상은 증오와 분열, 비상식적인 일들이 너무 익숙하다.

그런 세상 속에서 나는 자주 내 안의 본성을 느낀다. 그들이 저지른 것처럼, 그대로 되돌려줘야 한다고 말하는 마음.

성경 속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나는 그래도 그 길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변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마음을 품음으로써 나 자신이 좀 더 편해지려는 마음도 있다.

그것도 솔직한 내 모습이다.

 

그런데 더 깊이 묵상하다 보니 질문이 더 커졌다.

“과연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처음 이 말씀을 떠올리며 적용하고 싶었던 대상은

국가를 어지럽히고, 법을 무시하며,

억울한 죽음을 조롱하고,

선과 상식을 왜곡하는 사람들,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강간과 살인을 저지른 흉악범에게는?

사기로 타인의 삶을 무너뜨린 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집단,

나치,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에게까지?

그들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예수님의 용서는 단순히 감정적인 동정이나 인간적인 용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인류 전체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서 계셨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은

 

그들이 단순히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에 물든 인류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살아가는 그 깊은 본질에 대한 선언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의 이 기도는 ‘착한 사람의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회복하는 중보적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용서를 온전히 흉내 낼 수 없다.

누구에게나 그 말씀을 적용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너무 벅찬 이야기다.

 

하지만,

예수님의 용서를 떠올리고,

흉내라도 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마음조차 은혜의 시작이 아닐까.

그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고백마저,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는 출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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